96년 세칭 '연세대 사태'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연세대 부근에 있었다. 몸 담고 있던 동아리는 PD 계열이었고 나는 꿘과는 별 상관없는, 그저 여학생 뒷꽁무니나 열심히 쫓아다니던 방관자 비슷한 학생이었지만 우찌우찌된 사연으로 나는 당시 연세대 부근에서 뺑이를 치게 된 것이다. 우찌우찌된 사연을 논외로 치더라도 요지는, 나는 별다른 지향이나 사명감이 없는 상태에서 최류탄과 짱돌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벽이었던가? 전날 밤 홍대 캠퍼스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대오는 새벽 어름을 틈타 연세대 진입을 시도하였다. 옆에 학생들이 열심히 뛰니 나도 덩달아 열심히 뛰었다. 길거리엔 짓밟힌 찌라시만이 흉물스럽게 굴러다닐뿐, 대오의 앞길을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잠시 후엔 연세대에 진입하여 또다시 기나긴 좆뱅이의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 라고 한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후배 아이들 몇몇이 마스크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이 떠올랐다. 일단 한번 안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힘들텐데.. 지랄탄과 최류탄이 춤을 출 것이 뻔한 상태에서 마스크가 없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 사실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고깟 최류탄 좀 마셨다고 설마 사람이 죽겠는가? -

해서 잠시 대오에서 빠져나와 편의점에 들어갔다. 거기서 마스크와 생수 한병을 사고는 계산대 앞에 섰는데... 순간 대오의 뒤쪽에서 우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비교적 천천히 걷던 학생들이 쫓기는 쥐떼처럼 미친듯이 내달리는 것이 보였다. 황급히 마스크를 챙겨서 밖으로 나가보니... 그랬다. 청자켓에 화이바를 뒤집어쓴 백골단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뒤쫓아오고 있는 곳이 보였다. 순간 잠시 얼이 빠진 나는 길가에 서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대오는 연세대 쪽으로 사라져버렸고 백골단의 본대가 내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며 대오의 후미를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한마디로 백골단 본대 옆에 나만 멍하니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순간, 뭣하게 뭣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최대한 일반인을 가장하여 그 자리를 뜨는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길거리엔 백골단과 나 혼자 뿐. 그날 청자켓을 입지 않은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다만 백골단이 대오의 뒤를 쫓느라 인도에 멍하니 서 있는 나란 존재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대로 닌자처럼 주위 환경 속에 파묻혀있다가 저 새끼들 가고나면 슬그머니 사라져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백골단 단원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초췌한 몰골, 한손엔 마스크, 한손엔 물병 아무리 일반인을 가장하려 해도 나는 '어쩌다보니 대오에서 탈락하고 만' 바보 같은 대삐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너 이 자식 거기 서!!!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친 백골단원이 대오를 이탈하여 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진짜 좆됐다. 순간 다급해진 나는 물병도 떨어뜨리고 미친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새벽부터 또 뛰어야 하나. 우찌우찌된 사연으로 이곳까지 온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래도 큰 길로 도망쳐서는 각이 안나온다고 판단한 나는 골목으로 빠져 들었다. 설마 골목으로 도망치는데 쫓아오겠는가? 원래 맹수를 쫓을 땐 퇴로를 열어두는 법 아니던가!! -그러나 그 백골단원이 그저 순둥이처럼 생긴 나를 맹수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다.-

너 이 자식 거기 안서!!!

백골단원이 다시 고함을 쳤다. 뒤를 돌아보니 골목안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잡아서 일계급 특진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때 그냥 조용히 도망만 갔으면 좋았을껄 당시만 해도 아직 젊은 피가 펄펄 끓어넘치던 시기였기에 나는 어이없게도 고개를 돌려 그 백골단원에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야 이 놈아 너라면 서겠냐?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은 이와 같은 행동을 따라해서는 안되겠다.
이런건 용기가 아니다.

그저 '겁을 상실한 행동'일 뿐이다.

말에 격분한 백골단원은 기필코 나를 붙잡아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고야 말겠다는 더욱 가열차게 내 뒤를 바짝 뒤쫓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냥 닥치고 뛰기만 할 껄.

하지만 그날 내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백골단원의 윗사람 되시는 분이 '야!! 피래미는 냅두고 빨리 본대 쫓아!!' 라고 고함을 쳐주셔서 그 백골단원은 나를 쫓는 일을 멈추고 본대를 잡기 위해 연세대 쪽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당시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지만 지금 이자리를 빌어 그 백골단원의 윗사람 되시는 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그날 정말 뭣 될 뻔 했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두시간 정도 혼자 앉아 있었다. 밖으로 다시 나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백골단이 다시 골목안으로 들어올까봐 겁이나 나는 어딘지도 모르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만 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백골단에게 잡혀갈 위험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들자 슬슬 후배 아이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내 위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꼴에 선배라고 아무래도 후배 아이들만 연세대 안에 보낸것이 못내 미안했던 것이다. 해서 어떻게든 연대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골목 안에서 쇠파이프로 무장한 사수대 아이들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백골단을 습격하기 위해 조를 짠듯 보였다. 딴에는 우리편이라고 생각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가 연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인지 그들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알아서 하라는 한마디만 남긴채 총총히 사라져갔다. 아... 그 때의 고독감이란... 내가 최인훈의 광장이냐? 백골단에게 쫓기고 사수대에게 의심받고. 그렇게 무력하게 방치된 한 개인은 두시간 넘게 물한모금 못마신채 골목 후미진 계단에 쪼그려 앉아 존재론적 고독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야기는 그 이후로도 이어진다. 다만 그 기나긴 노정을 이 자리에서 전부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당시 연세대 사태에서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마도 나의 기본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에 가장 분노했던 것 같다. 연세대에 모인 아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 그르다를 떠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그 틀린 주장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백골단의 쇠 파이프와 지랄탄으로 봉쇄하려고 하는 거냐 라고 나는 며칠 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좀 절실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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