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지만 몇 년전까지만 해도 청계천에 산책 나가는 일을 제법 즐기곤 했다. 불현듯 이명박과 오세훈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청계천 산책을 그만하게 된 것은 아니고 그저 더 이상 청계천을 같이 산책할 누군가가 인생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유다.
청계천 산책의 대부분은 누군가와 함께였지만 간혹 혼자서 걸을 때도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조선일보 앞에서 시작해서 뚝섬까지 여섯시간 동안 혼자 청계천 길을 따라 걸었던 어느날 만났던 세 연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청계천을 산책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참으로 많은 커플들과 스쳐지나가게 된다. 젊고
상콤한 커플도 보이고, 나이 지긋한 중년의 커플도 보인다. 간혹가다가 황혼의 커플이
수줍은 듯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게 한가롭게 오후의 여유를 함께 즐기는 커플들을 보면 일단 입가에 미소가
새겨진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남의 행복을 보며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된걸까. 저들은
저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며 과연 어떠한 대화를 나누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문득문득 그들의 대화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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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커플을 발견한 것은 그런 호기심이
뭉글뭉글 가슴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중년의 커플. 둘 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그들은 잠시 산책을 멈추고 길 가에 멈춰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부부겠지. 젊은 시절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어려운 신혼
시절을 견디고, 이제 장성한 아이와 안정된 가정을 손에 넣은 상태겠지. 그리고
지난날을 회상하고, 미래를 다짐하기 위해 이 장소에 온 것이겠지. 그들의 얼굴은
격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과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를 했던 추억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걸까? 실례인걸 알면서도 슬쩍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김여사님 가정을 포기하십시오.
그래도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들은 잊으십시오. 저도 제 가정을 포기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당황했다. 당황하지 않을리 없었다. 누가봐도 행복한
결혼생활의 오후를 자축하기 위해 나온 중년부부로 보였단 말이다. 난데없이 가정을 포기하라는
둥, 아이들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는 둥, 사랑과 전쟁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의 인생, 남의 가정사였다.
내가 흥신소 직원도 아닌데 그들의 그 다음 행선지를 뒤쫓고 자시고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 당황한 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두번째 커플을 만난건 그로부터 30분 정도
지나서였다. 아마도 동대문 근처 어디였다고 기억되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노년의
커플이었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모두 맛본 경륜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커플이었다. 설마 저분들도 가정을 포기하네 마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지만 그런 너저분한 대화를
흘리기에 두사람의 표정은 느긋함 그 자체였다. 그렇다. 인생의 여유. 세상 모진
풍파를 오직 두사람의 힘으로 뚫고 이 자리까지 온 베테랑 커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여유가 두 사람 주위에 풍요롭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
여유라는 단어를 조금더 길게 설명한다면 사랑과 결속력이었다. 친구따라 간 카바레에서 만난
사람과 부웅켜 안고 스테이지 몇번 돌았다고 사랑하네 마네 신파를 읊조리는 불륜남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천 중앙의 돌다리 위에 앉아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인생의 막바지까지 달려온 두 사람은 과연 흐르는 강물을
보며, 지는 석양을 보며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걸까?
궁금했다. 몇십년의 결혼 생활도, 인생의 황혼도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분야였던 것이다. 해서 가던 길을 살짝 돌아와서 부득불 그들이 앉아 있는 돌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과거의 한귀퉁이를 다만 몇초만이라도 엿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 씨발
어제 빈 속에 소주를 다섯병이나 깠더니 하루종일 토가 나오네.
그러길래
작작 좀 처마시지 그랬어.
좀 쉈다가 해장술 한잔 더 해야
겠어요.
순간 미끄러운 돌에 발을 헛딛을 뻔 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느긋한 표정으로 황혼을 바라보는 노년의 커플 입에서 설마 어제밤의 과음에
관한 원망과 욕설이 튀어나올 줄은 정말로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이따가
한잔 더 한다니... 위의 대화를 보면 당연하게도 남자가 술을 마시고 여자가
걱정을 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소주 다섯병의 주인공은 바로 여성분이었다. 남편이 속을
썩여서 그런건지 단순히 주당이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노년의 여성분께서 어젯밤에 소주
다섯병을 드시고 하루종일 오바이트를 하신 것이고, 남자분께서 타박인지 앙탈인지 적당히 좀
마시라고 한마디 거들고 있는 시츄에이션이었던 것이다.
물론 양성평등 시대에 여성의 과음에 대해 옳다 그르다 가치판단을 할 마음은 없다. 그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많이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뿐이다. 대체 낼 모레 환갑으로 보이는 여성분께서는 어떤 인생의 굴곡을 거쳐오셨길래 보약을 다섯첩 달여드셔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빈 속에 소주 다섯병을 위장속에 쏟아부으신걸까? 그리고 그때 저 남편으로 짐작되는 남성분께서는 대체 무얼하고 계셨던 걸까? 의문에 의문이 이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돌다리를 건너는 것 외에 다른 옵션이 없었다. 그들의 인생이었고, 그들의 주량이었다. 아들 뻘 되는 내가 이러쿵 저러쿵 끼어들 입장도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세번째 커플을 만난
것은 돌 다리를 건넌 직후였다. 이번에는 젊은 커플이었다. 아니 어린 커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나이는 많이봐도 20대 초반. 그야말로 풋풋하고 싱그러운
한쌍이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그들이기에 그들의 사랑 역시 순수하고
깨끗할 것이 분명하였다. 하물며 인상들도 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청소년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건전 커플 그 자체였다. 그래 저 흐르는 물처럼 너희들의 사랑도 흘러
흘러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겠지. 그리고 더 넓게 더 깊게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리도, 삶의 비원도 깨닫게 되겠지. 후후후 원래 인생의 선배 모드는 좋아하지도,
잘 꺼내지도 않는 모드지만 그 커플을 본 순간만큼은 인생의 선배로서 흐믓한
미소를 안 지어줄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커플은 아름다웠으며 또 행복해보였다.
하물며 그들은 종종 걸음을 치며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가 장난스런 미소를 흘리며 종종 걸음으로 앞서 나가고
남자 아이가 그 뒤를 쫓으며 여자 아이를 향해 팔을 내뻗고 있었다.
아... 나 잡아봐라 놀이라니... 이 얼마나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청량한 순간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커플이 내 옆을 스쳐지나갈 때 나는 마치 이때까지
본 두 중년 커플들의 음습한 대화까지 용서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하나의 죄가 하나의 사랑으로 덮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 희망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작은 증표 정도는 될 수 있겠지. 소년 소녀들아 열렬히
사랑하거라 너희들이 사랑이 이 청계천의 희망이란다... 나는 귀기울여 이 어린 커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 귀를 씻어주렴. 너희들의 지저귀는 사랑의 밀어로 더렵혀진
내 귀를 깨끗하게 씻어주렴.
너 이 개 찐따 새끼 잡히면
뒤질 줄 알아...
그랬다. 이 어린 커플은 사랑의 나 잡아봐라
놀이 중인 것이 아니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목숨을 담보로한
추격전 중이었던 것이다. 채무 관계일까? 아니면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의 낭심이라도
걷어찼던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정말로 다급하게
내 옆을 스쳐지나갔고, 그 뒤를 쫓는 사내 아이 역시 잡으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빠르게 나를 지나쳤던 것이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들은 계속해서 종종 걸음으로 피 말리는
추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저 청계천 맑은 물에 피가 스며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이상이 내가 청계천을 홀로 걸으며 조우한 세 커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런 것이다. 혼자 산책할 때는 늘 세상을 향해 귀를 쫑끗 세워 두어라. 그럼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 곳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아님말고.



